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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미술관

[프랑스 루베] 수영장 미술관 2

프랑스 루베, 수영장 미술관, 라 피씬(La Piscine) 



수영장 2층







▲ Theodore Gueldry(1858-1945), Scène de triage de la laine(Wool sorting scene), 1910
수영장 미술관에는 루베의 예전 모습, 특히 직물산업이 흥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작품이 여럿 있다.





Delit Maille이라는 설치미술가의 프로젝트 <Multitude> 전시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을 15센티미터짜리 울 병사로 만들었다. Délit Maille는 릴 출신의 설치미술가인데 그녀의 이름은 ‘stitch offence’라는 뜻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기리는 작품을 의뢰 받고 작품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Délit Maille는 군인묘지를 방문한 뒤 이와 같은 울 병사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제 1차 세계대전 군인묘지에 갈 때마다 압도하는 감정은 전사자의 규모와 군인들의 나이(20세 미만의 '소년'들도 많다)에서 온다. 그 수많은 죽음은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에 휩싸인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들의 군복에 눈이 익은 사람이라면, 이 자그만 울 병사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울 병사들의 숫자와 그만큼의 연약함도.  


▼ Wool War One, 2014






▲ 전시실 벽에 적힌 문구.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의 말을 인용했다.


키플링은 대영제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애국시인이다. 말하자면 제국주의의 옹호자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나자 젊은이들을 보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전쟁 선전국에 몸을 담고, 젊은이들에게 조국을 위한 참여와 희생이라는 가치를 글로 썼다. 키플링은 외아들 존이 열 두 살이었던 1910년에는 아들에게 주는 시 <If>를 쓴 바 있다. 지금도 영국인에게 사랑받는 시다. 아들아, 진정한 남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그런데 키플링은 영국인 젊은이들이 진정한 남자가 되는 것은 가치있는 일로 보았으나, 정작 자신의 아들을 전쟁에서 잃자 큰 상심에 빠졌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나자 키플링은 아들 존을 아일랜드 경비부대(Irish Guards)에 보낸다. 부대 간부들과 아는 사이였다. 존은 시력이 나빠서 여러 번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던 까닭이었다. 아들이 진정한 남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열 일곱 살이었던 존은 서부전선에서 전사했다. 1915년 9월 루 전투 (Battle of Loos)였다. 서부전선의 여느 전투가 그랬듯이 독일군의 기관총을 향한 돌격전이었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수 만 명에 달했다. 


키플링은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고 몇 해 동안 서부전선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후 키플링은 Commonwealth War Graves Commission의 활동에 깊이 관여했고, <My Boy Jack>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잭은 아들 존의 아명)

존 키플링의 묘지는 1992년에 공식 확인되었다.


▲ Prairie Ghost / Museum Outfit. Mondrian
Inconnu / America



그리고 마지막으로 까미유 끌로델 전시실로 갔는데, 여전히 관람객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어서인지, 명절에 이 사람들은 가족과 미술 전시 나들이를 하는 것인지, 유달리 끌로델이 인기가 많은 것인지 모르겠다. 전시는, 까미유 끌로델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Jean-Louis Forain의 그림 <La Valse>와 끌로델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 La Va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