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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학

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저/강주헌 역 |효형출판 | 2004년 07월
원제 : A Year in Provence, 1989

동창들을 만나면, 50대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에 집을 짓고 마누라랑 둘이서 조용히 살겠다는 눈물겹고도 뻔한 이야기를 듣곤한다. 그 나이가 되면 제 새끼들은 대학 졸업도 안 했을텐데 자수성가시킬 자신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골까지는 아니어도 도시 근교나 비교적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건 많은 한국인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꿈임에는 틀림없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로 유명한 유럽, 특히 영국도 '우리의 마음은 남쪽을 향한다'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도시 런던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부유럽의 햇살 좋은 곳에 낡은 집을 싸게 사서 리모델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있는 걸 보면. 네덜란드에도 유럽 시골에 '집 구하기' 프로그램도 있고, 민박이나 가게를 꾸리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심지어 제목이 '나 떠나요'(Ik vertrek)다. 떠난 이들이 향하는 곳은 대체로 유럽 남쪽이다. 프랑스나 스페인 시골 마을.  

런던에서 15년 동안 광고회사를 다니던 저자 피터 메일Peter Mayle이 향한 곳은 프랑스 남쪽 뤼베롱 산자락. 이사 뒤 첫 해의 기록으로 프랑스 귀농기의 고전이다.(투스카니는 프란시스 메이어스, 프로방스는 피터 메일!) 200년된 농가에 난방장치를 설치하고 프랑스의 관료주의와 부딪히고 느려터졌지만 정겨운 시골사람들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잔잔하지만 유쾌하게, 이방인의 시선이 아니라 현지에 적응해가는 외지인의 따뜻함으로 적었다. 하루키의 글처럼 음식의 향, 맛, 색깔 등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서 감칠 맛 난다.
일상에 쫓겨 살며 자신만의 '남쪽지방'을 잊은 지 오래인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문장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다음날 회사에 가기 싫어지거나 할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이 꿈꾸는 스페인이나 프로방스보다 우리나라는 날씨도 더 좋쟎아. 자신만의 프로방스를 찾아내고 일구어야 하겠지.

피터 메일은 런던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 시골로 이사했지만 글을 못 쓰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집 고치고 시골 생활에 끙끙대느라... 그 과정을 담은 이 책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를 바탕으로 이 책의 속편도 나오고 소설도 나왔다. 그런데 책이 영화화도 되고 지나치게 유명해져서는, 그 마을에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다시 이사가서 왔다갔다하며 산다고. 이 책을 읽고 찾아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꼬맹이 둘을 데리고 피레네쪽 프랑스 시골로 이사간 부부를 알고 있는데, 가끔 네덜란드에 왔을 때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프랑스 사람들이란 얼마나 이상한가'에 관한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보다 이상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 그렇다고 한다!

먼저 우리는 시간을 좀더 철학적 관점에서 생각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달리 말하면 며칠, 몇 주씩 늦어지는 것을 프로방스식으로 생각하며, 햇살을 즐기면서 도시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번 달에 완성되든 다음 달에 완성되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파스티스나 홀짝대면서 편하게 생각해야지. (p.82)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음식과 일요일의 절묘한 결합이 프랑스 운전자를 차분하게 만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배가 부르다. 게다가 주말 휴일이다. 빈둥빈둥 시간을 죽이면서 천천히 달린다. 굽잇길에서 추월할 때 맛보는 짜릿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가끔 차를 멈추고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 길가의 덤불에 소변도 본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다정히 고개도 끄덕여준다. 내일이면 다시 가미가제 특공대의 망토를 뒤집어쓸지언정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것도 프로방스에서 맞는 일요일이다. 인생을 즐겨야 하는 법!(p.173)

양말을 마지막으로 신은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기억이었다. 내 시계는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지만 나는 마당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인지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욕심없는 식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