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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프랑스 플란더런

[Lille] 릴의 저항운동가, 레옹 트륄랑

서부전선은 이퍼르(Ieper)에서 남쪽으로 벨기에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이어진다. 벨기에 플란더런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 지방은 '프랑스 플란더런'이라고들 하는데, 벨기에 플란더런과 함께 예전에는 플란더런 백작령이었던 지방이다. 17세기 후반부터는 플란더런 백작령이 아니라 엄연히 프랑스 땅이 되었지만, 벨기에나 네덜란드쪽에서는 아직도 '프랑스 플란더런'이라고 흔히 말한다. 프랑스쪽의 공식 지명은 노르 파 드 깔레(Nord-Pas-de-Calais). 릴(Lille)과 아라스(Arras)가 중심도시다. 서부전선을 따라가려면 아르망티에르(Armentiers), 렌스(Lens) 같은 소도시 주변으로 가야하는데 숙소가 마땅치 않아서 전선의 동쪽인 릴에서 일주일, 아라스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릴(Lille)은 인구 22만명의 큰 도시인데, 주변에서는 쇼핑하기 좋은 도시로 알려져있고, 여행자들은 파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와서 릴 미술관을 들렀다 간다. 유로스타가 서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부르군디 공국의 수도였던 곳이어서 중세부터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릴이라면, 나는 저지대와 프랑스의 중간쯤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때에 릴은 전선에서 바로 동쪽이니, 독일군의 점령지였다. 1914년 10월. 릴은독일군에 맞서 13일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독일군의 공습을 이기지 못하고 점령되었다. 프랑스에서 이 유서깊은 대도시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전쟁 기간 내내. 1918년 10월까지. 전쟁이 끝난 뒤 도시는 폐허 더미였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1930년대 말까지 막사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가지는 역시나 '플란더런' 지방임을 느낄 수 있었다. '플란더런 건축 양식'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은 파사아드다. 건물의 전면. 격자형의 큰 창, 화려한 창틀 장식, 벽돌로 된 팔각형 종탑.



15세기에 부르군디 공국의 선량공 필립이 지은 리우르 궁(Rihour Palace) 주변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한창이었고, 건물 한쪽 벽에는 전사자 기념물(Monument aux morts)이 있었다.




'평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린다'는 것이 프랑스 추모 기념물의 주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해...'라고 기리는 문구를 많이 보았는데, 프랑스는 '평화'가 앞에 선다. 1916년 폭격으로 타버린 시청사가 있던 자리다. (시청사는 지금 자리로 옮겨갔고, 리우르 궁에는 관광안내소가 들어섰다)  부르군디의 궁정이었던 건물에서 겨우 남은 예배당 바깥벽에, 전쟁이 끝나고 1924년 부조 세 개를 만들었다. '평화', '교환', '죄수'를 주제로. 1914-1918년까지 릴 시민이 겪었던 고난을 보여준다. 


1915년 7월, 릴의 시타델에는 30명의 인질이 잡혀있었고, 131명의 시민은 독일로 후송되었다. 
1916년 11월에는 당시 릴 시장을 포함한 300명의 시민이 독일로 후송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압박용이었다.  

▲ 1914-1918, 1939-1945 동안에 전쟁으로 죽은 군인과 시민을 기리는 기념물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겨울날, 해가 가장 짧은 동지였다. 다른 계절에는 제법 푸르렀을 '포슈 광장'에는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의 기마상이 있다.


▼ 포쉬 광장




포슈(Ferdinand Foch,1851-1929)는 제 1차 세계대전때 프랑스군 원수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장군으로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 명장으로 꼽힌다. 마른 전투, 에이저르 전투, 이퍼르 전투 등을 이끌며 진급하여 1918년 봄에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기마상을 보며 릴 사람들이 대전때 겪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가늠했다. 벨기에나 네덜란드였다면, 기념물이라고 크게 소리내지 않고, 그저 기념할 인물의 이름과, 기억할 사건을 담백히 적어놓았을 것이다. 
15미터 높이. 멀리서도 눈에 띄게 'FOCH'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고, 네 면을 둘러 온통 격한 문장들이 적혀있다. 












고색창연한 릴 시내에서 이런 소년의 동상을 만난다면 지나치지 말고 잠시만 들여다보자.
소년의 이름은 레옹 트륄랑(Leon Trulin). 오페라 하우스 옆, rue Leon Trulin에 서 있다.

레옹 트륄랑은 대전때 독일군 점령지인 릴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1915년에 처형되었다. 18살이었다. 

발 아래에는 레옹이 어머니에게 쓴 마지막 편지 구절이 적혀있다. 

 


리우르 궁의 기념물을 만든 조각가가 1934년에 만든 조각상. 


벨기에에서 태어난 레옹 트륄랑의 가족은 아버지를 여읜 뒤 릴로 왔고, 레옹은 공장일을 하며 집안을 건사했다. 대전이 터지자 레옹의 고향뿐만 아니라 당시 살고 있던 릴도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고, 레옹은 군에 입대하려고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체격이 작았기에 영국군은 레옹에게 점령지 안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준다. 레옹은 'Noel Lurtin'(레옹 트륄랑의 애너그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또래 소년들을 모았고 15살, 17살짜리 친구들과 함께 정보를 모아 영국군에게 전달했다. 독일군에 붙잡힌 레옹은 1915년 11월 5일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3일 뒤 릴의 시타델에서 처형되었다. 


▼ Leon Trulin의 사진과 사형집행 공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