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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프랑스 플란더런

CWGC 묘지의 시작

제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지역의 CWGC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새삼 놀라는 점은 전쟁 그 자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묘지가 관리되는 모습에도 감탄하게 된다. 이 어마어마한 묘지들은 어떻게 마련되었고 어떻게 이렇게 관리되고 있는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묘지마다 같은 듯 다른 듯, 서글픈 듯 평화로운 듯, 성스러운 듯 안온한 듯한 분위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누가 디자인했을까?



▲ LE TROU AID POST CEMETERY, FLEURBAIX, 프랑스 (Sir Herbert Baker 설계)



CWGC는 Commonwealth War Graves Commission의 약자로,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를 말한다. 아직 전쟁 중이던 1917년 5월에 설립되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영연방 군인의 묘지를 관리하는데 그 지역이 153개국에 달한다. 묘역만 2,500개 가량이다.


묘지는 여러 명의 건축가가 설계했으나, 공통 원칙이 있으며, 각 건축가가 자유로이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CWGC 묘역을 설계한 주요 건축가인 Edwin Luytens에 관한 책에 당시 정황이 소개되어 있어 옮겨본다. 

영국의 건축가 Edwin Luytens(1869-1944)와 Herbert Baker(1862-1946)는 1917년 7월, 런던을 떠나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향했다. 대영내셔널갤러리 관장인 Charles Aitken 일행과 함께였다. 전쟁 묘지와 장차 세워질 기념물 디자인을 자문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전쟁은 3년째 접어들었고 북해에는 독일의 U 보트가 있었고 벨기에 해안부터 스위스까지 참호전이 진행 중이었다. 전쟁이 그렇게 커질 줄, 오래 갈 줄, 희생자가 그렇게 많아질 줄, 그리고 언제 끝날 줄, 아무도 몰랐다. 이들이 프랑스의 전쟁터를 방문하기 한 해 전, 솜 전투에서 영국은 6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벨기에의 이퍼르에서, 그리고 갈리폴리와 마케도니아까지 영국군 전사자 수는 늘어만 갔다. 식민지에서, 영연방국에서 병사들이 영국군에 합류했다.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1917년 4월 아라스 전투가 막 끝나고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방어선 뒤로 물러나게 된 1917년 5월에, 솜 전투 이후 묘지를 단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묘지들은 1918년 독일의 봄 공세때 파괴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1917년 여름, 이 건축가들을 전장으로 부른 사람은 Fabian Ware(1869-1949)라는 사람인데, 전직 교사이자 작가로, Imperial War Graves Commision(CWGC의 전신)을 세운 사람이다. 전쟁이 나자 적십자사에 지원한 Ware는 전사자나 부상자를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이전까지 전사자라면, 특히 일반 병사라면 그냥 한꺼번에 집단묘지를 만드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Ware는 생각이 달랐다. 일반 병사들도 가족들이 나중에 찾을 수 있도록, 신원이 확인된 개별 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시 중에는 제대로 묘지를 쓰기 어려웠으니, 단순한 나무 십자가로 가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전쟁은 길어졌고, 나무 십자가에 연필로 표기된 묘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Ware는 언론의 지지를 끌어내고 적십자사를 설득하여 묘에 신원을 제대로 표기하고 전사자를 등록 관리하며 묘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군에서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좋은 생각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1915년 군 당국이 적십자사와 함께 그 임무를 맡게 된다. Ware가 묘지등록위원회(Graves Registration Commission)의 책임을 맡았다. 



Brown's Copse Cemetery, Roeux, 프랑스(Edwin Luytens 설계)



전쟁 지역의 시나 읍이 관리하는 공동묘지가 넘쳐나자 묘지등록위원회는 각 지역 당국과 토지 사용 등에 관해 협의하고 관리 주체도 프랑스 지역 당국이 아니라 영국이 되도록 했다. 그러자니 토지가 너무 커서도 안되었고, 마을에서 너무 가까워서도, 군사병원에서 너무 멀어서도 안되었다. 프랑스 지방 당국의 공동묘지를 계속 쓸 수는 있었지만 영국측은 독자적인 관리를 원했던 것이다. 전사자수가 수 십만 명에 달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측에서도 무한정 토지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묘지 하나의 크기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묘지 사이의 간격은 23~30센티미터, 묘지 사이 통로 폭은 90센티미터를 넘지 않을 것. 

그 동안 전선 후방에서는 작은 군인 묘지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50기 이하의 묘지는 다른 묘지와 합쳐졌다. 1915년 3월 이후로는, 새로 묘지를 만드는 일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그 전까지 있던 작은 묘지를 합치는 방식이었다. Ware는 그 뒤에, 각 묘지에 개별적으로 기념물을 더하는 것도 제한했다. 그러니까 유가족들이 묘지에 기념물을 더한다거나 서열에 따라 묘의 장식이 달라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전쟁은 계속됐지만 묘지 관리 방식은 더 발전되어 갔다. 적십자사와 함께 지역 정원사들의 손을 빌어 잔디를 깔고 조경 관리를 했다. 영국에서 정원 전문가가 와서 조경 관리 지침을 내놓았다. 1917년 4월까지 15만기의 묘가 등록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전선의 묘지를 직접 찾은 건축가들은 눈으로 직접 보았던 묘지들을, 디자인하기 시작했고, 1921년에 묘지 세 개가 완성되었다. 최종적으로 서부전선에는 2316개의 묘지에 신원확인된 41만기, 신원불명인 15만 2천기의 묘가 마련되었는데, 이 중 970개의 묘지가 두 건축가의 손으로 설계되었다. 당시 묘지등록위원회가 1960년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 CWGC로 발전했다.  
(참조 : 《Cemeteries of the Great War by Sir Edwin Lutyens》by Jeroen Geu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