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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학

The Shadow of the Sun, 카푸시친스키

The Shadow of the Sun, Ryszard Kapuściński

폴란드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카푸시친스키(1932-2007)는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세계적 작가다. 저자가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글을 쓴다는 점을 헤아릴 때, 세계 각국 언어로 책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카푸시친스키의 방대한 저서 가운데 처음 읽었던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은 여행문학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존사고를 확장시켜주었다. 그의 책은 문학이자 저널리즘적 보고서이자 역사책이었다.

폴란드 언론사에서 일하던 카푸시친스키는 1965년부터 폴란드의 유일한 해외통신원으로 아시아, 유럽, 남아메리카를 취재한다.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에는 해외통신원으로 발령받은 첫 취재지인 인도와 중국에서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제3세계와 아프리카의 정치적 상황이 격변하던 시기, 전쟁과 쿠데타와 혁명의 시기에서 역사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의 축구전쟁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영어로 옮긴, 그의 저서는 특히 아프리카를 자주 다룬다. 지금의 아프리카는 문명의 세계와 대비되는 초자연의 세계, 기아와 전쟁의 대륙으로 비춰지지만 그가 글로 담아낸, 1960,70년대의 아프리카는 유럽제국주의에서 벗어나던 때였다. 

《The shadow of the sun》은 1998년에 폴란드에서 출판되었고, 2002년 빈티지 북스에서 폴란드 번역가 Klara Glowczewska의 번역으로 영어로 출판되었다. 
첫 페이지에 실린 저자 소개는 그가 "체 게바라, 살바도르 아옌데, 패트리스 루뭄바(콩고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와 친구"였으며 "27번의 쿠데타와 혁명의 증인이었고, 4번의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세상의 역사가 뚫고 지나갔을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야기는 1957년의 아프리카의 가나에서 시작된다.  카푸시친스키는 1957년 처음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뒤로, 45년 넘게 기회가 될 때마다 아프리카를 방문, 체류, 여행했다고 한다. 공식 루트와 궁전, 주요인사, 고위 정치인들을 피하고 히치 하이킹으로 트럭을 타고 유목민들과 함께 사막을 걸으며 농가에 묵었고 그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거의 반세기에 걸친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그의 눈과 목소리로 들려준다.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에서도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역사, 문화에 대한 시각과 여행, 삶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설명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문체.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감정이나 과장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글쓰기가 가능할지 감탄하며 읽었다. 밑줄 긋고 메모하며 잠시 책을 덮고 곰곰히 생각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 많았고, 시간과 공간의 배경이 방대하고 장소별로 꼭지를 나누어 쓴 글이라 단숨에 읽히지도 않았다.

수십 년전의 일을 어쩜 이렇게 다 기억하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수첩을 바탕으로 이 책을 완성했을까? 그 방대한 내용을 제대로 다 보관 또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저널리스트이니 기록과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겠지만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대학 신입생이 되고나서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 현대사는 굳이 옛날 일기장을 꺼내보지 않아도 될만큼 생생하게 나의 기억이자 역사로 남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 같다. 89년 5월이 어땠던지 8월이 어땠던지, 그 해 12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90년 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91년 5월에는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처음으로 군인이 아닌 대통령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모든 일을 밤새 얘기하라고 해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역사는 그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의 몸을, 인생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니까. 쿠데타를 취재하려고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으로 가는 험난한 과정 등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의 현대사가 절로 떠올라 좀체 떠나질 않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In the Shade of a Tree, in Africa>에는 아프리카에서 나무 그늘이란 어떤 것인지를 들려주는 부분이 나온다. 망고 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유일한 장소다. 아프리카에서 역사란 이 망고나무 아래에서 움튼다. 아프리카 북쪽의 이슬람 문화권을 빼고는, 아프리카에서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공동의 신화가 창조해내는  "구술전통"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마을에서 단 하나뿐인 나무 아래에서 일어난다는 내용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History is what is remembered."
역사를 기록하고자 여행했던 헤로도토스처럼 카푸시친스키도 자신의 여행기로 이렇게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기록해냈다.

아프리카를 어떤 미지의 세계로 보고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책이지만 책을 덮고 나면 자꾸만, 그늘 하나 없는 '태양의 그늘'에서 맨발로 모여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어떤 아름다운 이미지다. 그리고 이 책은 모든 여행기의 가장 원초적인 의무인, '가보고 싶게 만드는 것' '현장을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구실에도 충실해서, 나는 몇 번이나 세계지도를 꺼내서 카푸시친스키를 따라다녔다. 그는 여행하기 전에 그 곳에 대해 책으로 먼저 여행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책을 통한 여행이 더 즐겁고 진실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독자들은 이제 그의 여행기를 읽으며 아프리카 여행을 한다. 그러고도 아직 수많은, 여행해야 할 그의 아프리카 여행기가 남아있다.